내일은 개천절이다.

- 사설 / 조성윤

ㅡ사설  ㅡ
 조성윤 기자

 

해마다 맞이하는 10월 3일이지만, 올해만큼은 ‘개천(開天)’이라는 두 글자의 뜻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개천은 단순히 한 나라가 세워진 날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열리고, 인간이 세상에 자리 잡으며, 공동체가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오래된 기억이다.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제작한 이미지

우리 민족의 뿌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마고할머니라는 이름을 만난다. 마고는 단군왕검과 동일한 역사적 계보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해진 여러 창세 설화 속에서 마고는 세계의 근원과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또다른  이름으로 기억되어 왔다.

 

그 이름이 중요한 것은 마고가 실제로 언제 살았느냐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먼 조상들이 세상의 시작을 어떻게 상상했느냐에 있다.

 

하늘과 땅이 아직 갈라지지 않았던 태초의 세계, 산과 강과 인간이 서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던 세계, 그리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을 여성적 창조의 힘으로 상상했던 기억.

 

그 오래된 기억의 층위 위에 훗날 단군신화가 놓인다.

 

하늘의 뜻을 받은 환웅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다. 신단수 아래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한다. 곰과 호랑이는 인간이 되기를 원하고, 긴 인내의 시간을 견딘 곰은 웅녀가 된다. 그리고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단군왕검이 태어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오늘날의 역사학이 사용하는 실증적 연대기와 같은 방식으로 읽을 필요가 없다. 단군신화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상징과비유 일수도 있다, 신화에는 사실의 기록과 상징적 기억이 함께 들어 있다.

 

그러나 신화라고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민족이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화는 그 민족의 정신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창이다.

 

단군신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군이라는 한 사람만이 아니다.

하늘과 인간의 만남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다.

 

서로 다른 존재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이상이다.

오늘날 우리가 홍익인간이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그것을 낡은 고대의 문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라의 근본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아주 오래된 질문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힘 있는 자를 위한 나라가 아니라 사람을 이롭게 하는 나라.왕 지도자가  환웅의 통치 이념이다

특정한 집단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이롭게 하는 공동체.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가 인간 세상에 들어온 이유가 지배와 정복만이 아니라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고 교화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되새겨볼 만하다.

 

물론 우리가 마고에서 환웅으로, 웅녀에서 단군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하나의 실증된 혈통 계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의 뿌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와 역사를 구별하면서도 둘 사이에 함축 축적된 기억의 의미를 함께 읽어야 한다.

고조선의 실재와 단군신화의 형성 과정은 역사학의 연구 대상이다. 그러나 단군이라는 이름이 수천 년에 걸쳐 전세계와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기원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어왔다는 사실 또한 우리의 역사다.

 

특히 우리 역사가 외세의 침략과 식민 지배, 분단과 전쟁이라는 거대한 시련을 겪는 동안 단군은 단순한 고대의 시조를 넘어 공동체의 기억을 붙드는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개천절은 과거를 미화하는 날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오래된 기억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날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맹목적인 신화화도 아니고 냉소적인 부정도 아니다.

 

우리의 신화를 우리의 것으로 당당하게 바라보면서,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오늘의 눈으로 다시 읽는 일이다.

마고할머니에서 단군왕검에 이르는 오래된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운다.

민족의 뿌리는 어느 한 시대의 정치적 선언에서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세대가 살아가면서 남긴 기억과 이야기, 자연에 대한 감각, 공동체에 대한 이상,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정신적 뿌리를 이룬다.

우리의 뿌리 역시 그러하다.

그 뿌리는 한반도의 산과 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와 이름 속에 있고, 세대를 거쳐 전해진 이야기 속에 있으며, 어려운 시대에도 공동체를 지켜온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다.

 

그리고 그 가장 오래된 기억 가운데 하나가 개천의 이야기다.

하늘이 열리고 인간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

그것은 과거의 어느 하루에만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열 것인가."

"힘과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인가."

아니면 인간을 이롭게 하고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세상인가.

단군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군이 살았다는 연대를 되풀이해서 외우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공동체의 근본에 무엇을 두고자 했는지를 기억하는 일이다.

 

홍익인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오래된 이상.

그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개천절에 되살려야 할 정신이다.

세계가 갈라지고 국가와 민족이 서로 경쟁하며, 기술과 자본의 힘이 인간의 삶을 앞질러가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라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천절은 그 질문을 우리에게 돌려준다.

마고의 오래된 창세 기억에서 환웅의 하강으로, 웅녀를 거쳐 단군왕검의 건국 이야기로 이어진 긴 정신적 여정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오늘에 갑자기 생겨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세대의 기억을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개천절은 단순히 오래된 건국 신화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우리의 뿌리를 기억하고, 그 뿌리에서 어떤 미래를 길어 올릴 것인지 스스로 묻는 날이다.

하늘은 이미 오래전에 열렸다.

 

이제 우리가 열어야 할 것은 미래다.

그리고 그 미래가 진정 우리의 미래가 되려면, 오래된 ‘홍익’의 뜻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실천해야 한다.

 

칼럼니스트  조성윤

그것이 오늘 개천절에 우리가 마고를 기억하고, 단군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작성 2026.10.02 11:13 수정 2026.10.04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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